본문 바로가기

그림과 나

그래피티와 스트릿 아트 & 키스 하링

여자의 성기Θ를 묘사해 놓고 거기다 화살표 ↙를 그려 놓는다거나 아니면 남자 성기0←가 삽입되는 것을 그린 상상할 수 없이 아찔한 그림과 그 이름을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한 글자(자지, 보지, 빨아, 삽입, 성교,  똥구멍...)를 보고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본 가장 최초의 그래피티는 초등학교 재래식 변소에 그려지고 쓰여진 이런 저질스런 낙서였다. 집에서건 학교에서건 배운 적이 없는 그 글자의 의미를 그렇게 해서 알게 되었던것 같다. 나는 그런 것들이 흥미로와서 매번 다른 문을 노크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과연 누가 저런 저질스런 그림을 그리고 글자를 그것도 공공장소에다 쓸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내가 아직 섹스나 몸에 대해 전혀 모르던 그 시기에 최초의 경이로움이었던 것 같다. 우리의 화장실은 공공장소에서까지 개인의 비밀을 지킬 수 있도록 아주 폐쇄적으로 밀폐 되어 있다. 그래서 성에 폐쇄된 당시에도 그런 것들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뉴욕에 와서 보니 이것은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 퍼블릭에도 표현할 수 있는 예술로 접목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림을 접하고 입을 딱 벌렸다.

원시인들은 동굴 안에 동물들의 그림을 그렸다.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는 이런 그림들은 고대 이집트의 무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곳에는 이 아트가 존재했다. 그것은 사람이 네 발 가진 동물과 다르게 두 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동물보다 월등히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뛰어난 머리는 상상과 공상 그리고 망상이라는 기발한 것도 할 수가 있다.

그래피티의 천재 키스 하링(1958-1990)을 소개한다. 그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에이즈로 죽었다. 그가 그린 그림은 설명이나 해설이 따로 필요없다. 그림 안에 그의 감정이 그대로 묻어 나왔기 때문이다.


아래 글 There really can't be anymore anonymous sex-Keith Haring은 그가 작은 도시 피츠버그에서 자유의 도시 뉴욕에 와서 아트스쿨에 다니면서 얼마나 성생활을 난잡하게 했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 것들이 그의 그림에 직접적으로 자극을 준다. 이름도 모르는 그냥 지나가는사람(anonymous)과의 죽어도 좋을만큼 쾌락에 빠진 섹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치유할 수 없는 병(에이즈)에 이르게 하고 죽음까지 초래한다. 항문(똥구멍)에 넣고 하는 섹스가 죽어도 좋을 만큼 즐거울까? 말리고 싶지만 하고 싶다면  꼭 고무장갑(콘돔)을 끼고 해라. 결벽증이냐고? 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이 있는데 하면 안될 것이 있다. 하옇튼 이 유망한 아티스트가 에이즈에 걸려서 이리도 빨리 죽어야 했다니 자유롭게 표현한 그의 아트를 보다가 안타깝기만 했다. 아래 그린 그림은 에이즈로 판정되고 죽기 전에 그린 그림이다. 무지해서 무섭고, 침묵은 죽음으로 이르게 한다는 말인데 결국 무지는 죽음으로 이르게 한다는 말이다. 장갑을 끼지 않으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 글 중에 콘돔과 바나나를 참고하기 바란다.

인간이 다 가질 수는 없다. 적당히 아트를 하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이렇게 크레이지 아티스트가 될 것인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일반 사람들(common sense를 가진 사람들)은 맨정신에도  이런 크레이지 아트를 적당히 흉내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영어를 적당히 흉내내서 안되는 것처럼 예술도 같은 원리이다. 자신이 하는 일(예술)에 저 정도 미치지 않으면 해낼 수가 없다. 뉴욕에 와서보니 별 크레이지들이 다 있다. 돈도 안받고 밤새 저렇게 그리는 사람들. 그리는 것이 즐거워서 사는 사람들..... 내일 죽어도 좋은 사람들은 낮이고 밤이고 휘청거린다.


There really can't be anymore anonymous sex.
-Keith Haring
anonymous : (of a person) not identified by name; of unknown name

In 1978, at the height of the sexual revolution, Keith Haring arrived in New York and attended the School of Visual Arts.

Frequenting the backrooms and public baths where the gay community hung out, the sex that haunted his nights soon became the fruit and the main inspiration of his research. Strongly marked by the atmosphere that reigned in the city, full of teeming life, carefree sex, brilliant colors and communal effervescence, Keith Haring was quickly noticed for the realism of his perception of the body and sexuality. The erotic figures that he developed then resonated as the translation of the confidence necessary to any union acting on the loss, within that union, of the individuality of each of them. Throughout his entire career, the way he portrays the male genitals reveals both unceasing, voracious and submerging desire, and is an allegory for nirvana. Sex also appears in full realism as a guarantee of the durability of human relations and as the symbol of reconciliation, union and harmony between different entities.

But sex, symbol of the regeneration and transmission of life, soon becomes the vector of death when it appears in the early eighties as the specter of AIDS, that Keith Haring was to die of in 1990.

키스 하링 "에이즈가 걸리기 까지" 더 읽기
 http://www.haring.com/cgi-bin/essays.cgi?essay_id=09

키스 해링

키스 해링은 1958년 5월 4일 펜실베니아주 레딩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아버지로부터 만화 그리기의 기초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상업 예술학교인 피츠버그 소재 아이비 전문 예술학교에 입학, 학업을 마친 후에도 독학을 계속해갔다.

다운타운의 에너지와 뉴욕 시의 정신에 휩쓸린 키스 해링은 길거리, 지하철, 클럽 등지의 벽을 자신의 캔버스로 삼아, 애호가들만이 아닌 평범한 행인들에게 말을 걸었다. 말하자면 그만의 예술언어로 도시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셈이다.

그래피티란 당시만 해도 십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고, 그 가치 역시 저평가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낙서는 이들의 소통방식이자 의사소통의 수단이었다. 해링은 'LA II'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15살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엔젤 오르티즈(Angel Ortiz)와 공동으로 작업하게 된다.

해링은 샤프라지(Shafrazi)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게 되었고, 이 전시회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수많은 예술가들과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전시회장을 찾은 것이다.

키스 해링은 피에르 알렉친스키(Pierre Alechinsky), 장 뒤뷔페(Jean Dubuffet), 브리온 기신(Brion Gysin)등의 아티스트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그야말로 본격적인 '대중' 미술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는 앤디 워홀을 포함한 수많은 친구, 팬, 정신적인 스승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해링의 언어는 너무나도 단순한 기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트· 아기· 개 등의 실루엣 등을 어떻게 사용하고 배치하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들을 만들어낸다. 또한 해링은 이들 언어를 강렬한 색채로 즐겨 표현해냈다.

해링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나 밀로의 비너스 상 같은 유명한 조각상을 본뜨는가 하면, 그리스/이집트의 벽화와 문화유산으로서의 미술품들에 키치와 팝아트적 요소를 가미하여 대중적인 감성으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해링은 또한 여행을 많이 다닌 편이었는데, 파리를 여행하던 중 피카소의 작품에 흥미를 갖게 된다. 이 시기, 그의 몇몇 작품들은 전반적인 스타일로부터 다소 이탈한 듯한 느낌을 준다.

1988년, 해링은 에이즈 양성판정을 받게 된다. 그는 곧 '키스 해링 재단'을 설립하여 에이즈 관련 기구 및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등을 지원하는 활동에 나선 한편, <피사의 벽화(Pisa's Mural)>(1989)등의 벽화 작업을 하였는데, 그 안에서 탄생과 죽음, 사랑, 섹스, 전쟁과 평화 등의 우주관을 표현해냈다.

결국 1990년 2월 16일, 키스 해링은 에이즈 합병증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31세의 나이였다. 그의 기호와 그림들은 20세기에 가장 주목 받은 시각 언어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또한 그의 작품은 여전히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갤러리와 거리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 걸고 있다.

번역 참조 http://www.designflux.co.kr/other_sub.html?code=24&board_value=designstory


Biography of Keith Haring
Keith Haring was born on May 4, 1958 in Reading, Pennsylvania, and was raised in nearby Kutztown, Pennsylvania. He developed a love for drawing at a very early age, learning basic cartooning skills from his father and from the popular culture around him, such as Dr. Seuss and Walt Disney.

Upon graduation from high school in 1976, Haring enrolled in the Ivy School of Professional Art in Pittsburgh, a commercial arts school. He soon realized that he had little interest in becoming a commercial graphic artist and, after two semesters, dropped out. While in Pittsburgh, Haring continued to study and work on his own and in 1978 had a solo exhibition of his work at the Pittsburgh Arts and Crafts Center.

Later that same year, Haring moved to New York City and enrolled in the School of Visual Arts (SVA). In New York, Haring found a thriving alternative art community that was developing outside the gallery and museum system, in the downtown streets, the subways and spaces in clubs and former dance halls. Here he became friends with fellow artists Kenny Scharf and Jean-Michel Basquiat, as well as the musicians, performance artists and graffiti writers that comprised the burgeoning art community. Haring was swept up in the energy and spirit of this scene and began to organize and participate in exhibitions and performances at Club 57 and other alternative venues.

In addition to being impressed by the innovation and energy of his contemporaries, Haring was also inspired by the work of Jean Dubuffet, Pierre Alechinsky, William Burroughs, Brion Gysin and Robert Henri’s manifesto The Art Spirit, which asserted the fundamental independence of the artist. With these influences Haring was able to push his own youthful impulses toward a singular kind of graphic expression based on the primacy of the line. Also drawn to the public and participatory nature of Christo’s work, in particular Running Fence, and by Andy Warhol’s unique fusion of art and life, Haring was determined to devote his career to creating a truly public art.

As a student at SVA, Haring experimented with performance, video, installation and collage, while always maintaining a strong commitment to drawing. In 1980, Haring found a highly effective medium that allowed him to communicate with the wider audience he desired, when he noticed the unused advertising panels covered with matte black paper in a subway station. He began to create drawings in white chalk upon these blank paper panels throughout the subway system. Between 1980 and 1985, Haring produced hundreds of these public drawings in rapid rhythmic lines, sometimes creating as many as forty “subway drawings” in one day. This seamless flow of images became familiar to New York commuters, who often would stop to engage the artist when they encountered him at work. The subway became, as Haring said, a “laboratory” for working out his ideas and experimenting with his simple lines.

Between 1980 and 1989, Haring achieved international recognition and participated in numerous group and solo exhibitions. His first solo exhibition in New York.was held at the Westbeth Painters Space in 1981.  In 1982, he made his Soho gallery debut with an immensely popular and highly acclaimed one-man exhibition at the Tony Shafrazi Gallery. During this period, he also participated in renowned international survey exhibitions such as Documenta 7 in Kassel; the São Paulo Biennial; and the Whitney Biennial. Haring completed numerous public projects in the first half of the 80’s as well, ranging from an animation for the Spectacolor billboard in Times Square, designing sets and backdrops for theaters and clubs, developing watch designs for Swatch and an advertising campaign for Absolut vodka; and creating murals worldwide.

In April 1986, Haring opened the Pop Shop, a retail store in Soho selling T-shirts, toys, posters, buttons and magnets bearing his images. Haring considered the shop to be an extension of his work and painted the entire interior of the store in an abstract black on white mural, creating a striking and unique retail environment. The shop was intended to allow people greater access to his work, which was now readily available on products at a low cost. The shop received criticism from many in the art world, however Haring remained committed to his desire to make his artwork available to as wide an audience as possible, and received strong support for his project from friends, fans and mentors including Andy Warhol.

Throughout his career, Haring devoted much of his time to public works, which often carried social messages. He produced more than 50 public artworks between 1982 and 1989, in dozens of cities around the world, many of which were created for charities, hospitals, children’s day care centers and orphanages. The now famous Crack is Wack mural of 1986 has become a landmark along New York’s FDR Drive. Other projects include; a mural created for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Statue of Liberty in 1986, on which Haring worked with 900 children; a mural on the exterior of Necker Children’s Hospital in Paris, France in 1987; and a mural painted on the western side of the Berlin Wall three years before its fall. Haring also held drawing workshops for children in schools and museums in New York, Amsterdam, London, Tokyo and Bordeaux, and produced imagery for many literacy programs and other public service campaigns.

Haring was diagnosed with AIDS in 1988. In 1989, he established the Keith Haring Foundation, its mandate being to provide funding and imagery to AIDS organizations and children’s programs, and to expand the audience for Haring’s work through exhibitions, publications and the licensing of his images. Haring enlisted his imagery during the last years of his life to speak about his own illness and generate activism and awareness about AIDS. 

During a brief but intense career that spanned the 1980s, Haring’s work was featured in over 100 solo and group exhibitions. In 1986 alone, he was the subject of more than 40 newspaper and magazine articles. He was highly sought after to participate in collaborative projects ,and worked with artists and performers as diverse as Madonna, Grace Jones, Bill T. Jones, William Burroughs, Timothy Leary, Jenny Holzer, Yoko Ono and Andy Warhol. By expressing universal concepts of birth, death, love, sex and war, using a primacy of line and directness of message, Haring was able to attract a wide audience and assure the accessibility and staying power of his imagery, which has become a universally recognized visual language of the 20th century.

Keith Haring died of AIDS related complications at the age of 31 on February 16, 1990. A memorial service was held on May 4, 1990 at the Cathedral of St. John the Divine in New York City, with over 1,000 people in attendance.

Since his death, Haring has been the subject of several international retrospectives. The work of Keith Haring can be seen today in the exhibitions and collections of major museums around the world.

원본 참조 http://www.haring.com/about_haring/bio/index.html


1958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레딩(Reading)에서 태어나 쿠츠타운(Kutztown)에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닥터 수스(Dr. Seuss)와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만화영화를 즐겨 보며 그림 그리기에 흥미를 가졌다. 1976년 피츠버그의 아이비전문예술학교에 입학하여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1978년 뉴욕으로 옮겨 와 시각예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해링은 뉴욕 거리의 벽면과 지하철 플랫폼에 그려져 있는 낙서 스타일의 그림을 보고 깊은 영감을 얻었다. 다운타운의 활기찬 에너지와 신선한 기운 속에서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감지할 수 있었다. 길거리, 지하철, 클럽 등지의 벽은 이제 그의 캔버스가 되어 지나가는 평범한 행인들에게 말을 걸었다. 즉, 그만의 예술언어로 도시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빈번히 공공기물 훼손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지만 사람들은 해링의 독특한 이미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픽토그램(Pictogram) 같은 간결한 선과 강렬한 원색,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표현에서 단번에 그의 재능을 간파한 딜러 토니 샤프라치(Tony Shafrazi)는 자신의 갤러리에서 그의 개인전을 기획하였다. 해링은 이 전시를 계기로 스타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하위문화로 낙인찍힌 낙서화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창조해낸 그의 그림은 뉴욕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

해링은 다른 낙서화가들과 다르게 인종차별반대, 반핵운동, 동성애자 인권운동, 에이즈 교육 등의 사회문제를 다루었다. 그의 작품은 거리와 지하철을 벗어나 티셔츠와 배지, 벽화, 공익광고와 포스터 등으로 제작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그의 이미지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표현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탄생과 죽음, 사랑과 섹스, 전쟁과 평화 등의 우주관을 담고 있다.

1990년 2월 16일 해링은 뉴욕에서 만 서른 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주요 작품에는 《무제 Untitled》(1982), 《앤디 마우스-뉴 코크 Andy Mouse-New coke》(1985), 《무지=공포 Ignorance=Fear》(1989) 등이 있다.

참조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피에르 알렉친스키(Pierre Alechinsky) 작품보기





장 뒤뷔페(Jean Dubuffet) 작품보기






브리온 기신(Brion Gysin) 작품보기




posted by Sunny in New Y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