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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생활 기본영어

내가 영어 잘하는 이유 & 한국 영어교육의 미래

우리의 영어교육은 지금,
영어로 말을 못하고 영어를 알아 듣지 못하는 영어교사, 영어강사가 영어교육현장의 선두에 있다.
간단히 이렇게 비교해보자.
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미국인이 한국말도 할줄 모르고~ 한국말을 듣고도 무슨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는데~
문법 문장 단어 등을 열심히 공부해서 자격시험에 통과해서 학생을 가르치는 자격증을 받았다고 보자.
그 사람이 한국어를 가르친다면?
과연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다 한국어를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일까?
언어는 의사소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인데...
우리말과 영어의 소리가 다른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기득권을 잡고 있는 영어교사나 강사가 직업을 포기하지 않아서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간단하다. 그런 교사와 강사들에게 배우지 않으면 된다.
문제는 그것을 깨닫고 있는 사람들조차 그런 교사나 강사에게 배우러 간다.
다 그쪽으로 가니 그냥 따라가는 것이다.
언어를 언어로 가르치고 언어로 배우는 그날이 오기를 기다려본다.
생각이 자유로워지면 그날은 금방 온다.

제목을 내가 영어 잘하는 이유라고 해서 나 써니가 영어를 잘하는줄 알것 같다.
지금도 영어를 배우고 있고 영어를 잘하고 싶은 사람이다.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서 살면서 생활하는 모든 일상사가 우리말과 관련이 되어진 것처럼 영어도 이들의 일상사가 영어와 관련이 되어 진행되기 때문에 단순히 이들의 소리를 익히거나 문장을 외워서 말을 한다고 영어가 끝이 나는 것이 아니다.
파고 더 파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 언어라는 생각이다.
"얼마나 하면 미국인들처럼 영어를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사람 많다.
내 대답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세살짜리 아이가 말하고 알아 듣는것~ 열살짜리, 스무살, 서른살,.. 더 나아가 어떤 관심사에 얼마만큼 관심을 갖고 파헤치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대답을 확실하게 해줄 수가 없다.
"하면 할수록 알면 알수록 너무 흥미진진하다."는 것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다.
아래 글은 미국생활을 하면서 공감하는 내용의 글이어서 다른 분들과 나누고 싶어서 올린다.

[삶의 향기] 내가 영어를 잘하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2012.06.26 00:50 / 수정 2012.06.26 00:13

글: 조화유 재미칼럼니스트 소설가

20대 조선일보 기자 시절, 나는 서울의 미국공보원(후에 미국문화원)에서 역사 전문잡지 ‘American Heritage’(미국의 유산)에 ‘The Little Korean-American War’(한국과 미국의 작은 전쟁)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는 글을 발견했다. 6·25 때 말고 미군이 언제 또 한반도에 들어왔었나 싶어 당장 읽어보았다.

 그것은 1871년 미국 함정들이 강화도 일대에서 조선왕조 군대와 싸운 신미양요 이야기였다. 그 글에는 내가 그때까지 몰랐던 사실이 많이 들어 있었고 처음 보는 사진들도 있어 놀랐다. 이 글을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하고 싶어 필자 이름을 보니 Andrew C. Nahm이라고 되어 있었다.


 남(南)씨 성을 가진 한국계 미국인 같았다. 잡지에는 ‘웨스턴 미시간 대학교(WMU)의 역사학 교수’라고만 적혀 있었다. 미국 대학 안내책자들을 뒤진 끝에 그 대학 주소를 알아내어 Nahm 교수에게 영어로 편지를 써 보냈다. 얼마 후 답장이 왔는데 추측대로 그는 남창우라는 한국계 미국시민이었다. 웨스턴 미시간대에서 동양사를 가르치면서 한국학연구소도 책임지고 있었다. 남 교수는 자신의 글 번역을 쾌히 허락했고, 나중에 나는 번역문이 실린 잡지(월간중앙)를 그분에게 보내 드렸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웨스턴 미시간대에서 역사학 석사과정을 밟으러 1973년 여름 단돈 150달러를 손에 들고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미시간주의 아름다운 작은 도시(Kalamazoo)에 있는 그 대학교에 가보니 뜻밖에도 한국인 교수 두 분이 더 계셨는데, 그중 한 분은 장도영 장군이었다. 장 장군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는데 쿠데타 세력에 의해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투옥되었다가 미국으로 쫓겨나 정치학 교수가 됐다.


그 대학 역사학과 과장이었던 남창우 교수는 나에게 연구조교(research assistant) 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셨다. 당시 캐딜락 한 대 값이 약 7000달러 할 때인데, 조교 연봉은 3000달러 남짓 했다. 등록금과 기숙사비는 간신히 낼 수 있었다. 72년 한국에서 친 TOEFL시험 작문과 어휘 부문에서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득점을 한 나는 영어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레고리(Dr. Gregory)라는 교수는 내가 써낸 ‘한국전쟁 기원론’에 A학점을 주고는 맨 끝에다 “자네는 대부분의 미국인보다 영어를 더 잘 쓰네”라는 극찬의 말을 써주셨다. 나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기고만장한 자존심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나는 곧 한국에서 데려올 가족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학 구내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식당 매니저가 나를 부르더니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해고하는 것이었다.

  미국 교수로부터 대부분의 미국인보다 영어를 잘 쓴다는 칭찬을 들은 내가 일개 식당 매니저로부터는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잘리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나는 몹시 화가 났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말이 되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학문적인 고급영어는 잘 알아듣고 잘 썼지만, 거리의 평범한 미국인들이 매일 사용하는 실생활 영어는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식당 매니저가 부처님보다 더 큰 깨달음을 나에게 안겨준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미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말을 귀담아듣고 처음 듣는 말은 모조리 노트에 적어 무조건 외웠다. 그리고 미국인과 대화할 때 그 말들을 써먹었다. 이때 노트에 적어놓은 것들이 나중에 내가 동포 신문에 생활영어 칼럼을 쓰고 그것을 다시 보강하여 ‘이것이 미국영어다’ 시리즈를 출판할 때 귀중한 밑천이 되었다.

 나에게 미국행 기회를 마련해주신 남창우 교수님, 내 영어 실력을 과찬하고 격려해주신 미국인 교수님, 그리고 내가 실생활 영어에 얼마나 약했던가를 일깨워준 그 대학 구내식당 매니저, 이 세 분은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람들이다.


출처: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569575&cloc=olink|article|default